"우미관, 단성사, 협률사, 연흥사, 광무대... 이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예전에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김두한, 쌍칼, 시라소니, 하야시, 구마적, 신마적 등 일제 강점기 종로를 배경으로 하는 당대 주먹들의 이야기 입니다. 그 때 김두한은 종로의 한 극장이 자기 거점이 되었는데요. ‘우미관’은 그 시대 최고의 극장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기록된 극장의 모습과 당시 국악 공연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공연은 철저히 자본에 의해 움직입니다. 수많은 가객과, 사당패, 기생들은 공연을 하면 그에 따른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받았습니다. 기예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재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00년에 접어들자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902년에 ‘단성사’가 세워집니다. 이 때부터 수많은 공연이나 음악은 극장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활약했던 사람들
박춘재 같은 소리꾼은 극장을 중심으로 많은 활동을 했고, 그만큼 명성도 자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외에도 박춘경, 이순서, 엄태영, 유태환 등 많은 소리꾼들이 활약했습니다. 이 때부터 기생들은 삼패라는 신분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일패기생들과 삼패기생들은 똑같이 공연자의 신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극장은 흥행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기녀들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고 어떤 레퍼토리를 공연에 올릴 수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나중에는 대중적 흥행에 도움이 되는 삼패기생들의 잡가가 성행했습니다. 그 때 가장 이름이 난 사람은 한인오, 최홍매 등의 기생입니다.
정악의 후퇴와 잡가의 흥행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가곡, 가사, 시조를 했던 (정악)소리꾼들은 극장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극장측의 이해관계와 가객들의 자존심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극장은 무조건 흥행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가객들은 극장에서 대중들과 어울리는 것은 천하게 여겼습니다. 이들 중 한 쪽이라도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가곡, 가사, 시조도 극장에 자주 올라 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극장에 가장 많이 온 사람들은 서민과 하층민이 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극장에선 연희가 가장 인기가 많았고 그 뒤를 이어 잡가 공연이 성행했습니다. 여기서 수많은 노래집이 발간되는데 주로 ‘잡가집’이 대단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잡가의 인기를 반증하는 사례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어진 극장 공연은 1920년대 부터 1930년대 중반에 절정을 이룹니다. 현행 12잡가가 형성된 시기는 이 때부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보존의 형태로 잡가가 전승될 뿐이지만 당시에는 공연에서 자연스레 우리 국악을 즐겼다고 했으니 우리 전통 문화이 맥이 일제 군국주의와 전쟁으로 끊겼던 것이 아쉽습니다. 만약 이 맥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고 발전 했었더라면 지금 우리 국악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극장들도 상당수가 쇄퇴하거나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레퍼토리도 많이 바뀌어 서구의 영화들을 상영하는 빈도가 늘어나며 서서히 극장 내의 국악은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옛날 극장문화 속의 국악을 알아보았습니다.
'문화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연장에 갈 때 준비해야 할 것은? – 공연 관람 에티켓 (0) | 2021.03.26 |
---|---|
판소리의 장단 - 3편 (0) | 2021.03.24 |
조선 후기와 근대의 정음과 서민음악 (0) | 2021.03.21 |
판소리의 장단 - 2편 (0) | 2021.03.20 |
퓨전국악의 역사와 흐름 (0) | 2021.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