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국악은 조선 초기에는 이상향을 그리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엔 민간을 중심으로 전해 내려 온 노래는 뚜렷한 기록, 보존자료가 많지는 않아 어떤 노래들이 불리웠는지는 현재 전승되는 민요형태와 노동요를 중심으로 유추할 수밖엔 없습니다.)
조선시대부터 국악은 성리학의 영향을 깊게 받습니다. 학문적 이상과 음악적 이상을 추구하며 부르고 연주했던 음악은 ‘정음’입니다. 정음을 행하는 음악가들에겐 음악은 수행의 결과이고 품격을 의미했습니다. 향락과 유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학문과 수행의 목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노래들은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음악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은 일반 백성들에게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음악을 누리는 조건은 오직 향유를 위한 것고 때로는 쾌락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때로는 삶속에서 사람간의 유대를 강화하거나 노동의 힘겨움을 이겨내는 장치로도 작용을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으나 ‘정음’도 결국 향유로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민이 즐겼던 잡가에는 정음의 영향이 깊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목적이 달라도 ‘음악’이 완벽하게 구분되지는 않았습니다.
18세기부터는 이 두 장르가 혼재되는 양상이 일어났습니다. 정음은 중인계층 이상이 향유하는 음악이라 ‘신분제’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 때 18세기는 서서히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상공업이 발달하며 부유함과 신분은 별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향을 표방한 ‘정음’은 일반인들도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이 되었고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음악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소리판이 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정음’을 함께 즐기기도 했고 기녀들이나 가객들의 활동에서 보듯 모든 소리는 향유가 목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조나 가사의 형태에서 대중성이 가미되어 잡가로 파생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정음과 일반 음악이 섞이기도 하고 장르의 일부로 변모하기 시작되는 것은 음악이 가진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서양음악도 이 과정이 동일하게 있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과 연관된 노래들이 불리웠던 음악은 어느 순간 대중이 부르는 노래와 섞여 어느 것이 대중음악이고 어느 것이 종교음악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조류로 만들어져 향유를 위한 음악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며 이런 양상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음악은 유흥의 목적이 더욱 강해져 소리판이 열리면 예도적인 ‘정음’과 대중적인 음악 어느 것이든 대중의 호응을 얻게 됩니다. 그러다 극장이 설립 되면서 대부분의 공연은 ‘흥행’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흥행성을 갖춘 음악은 대중성을 가진 노래들이 었으며 상대적으로 ‘정음’이 활약할 여지가 줄어듭니다.
물론 이 때 신분적인 기득권을 가졌던 기존의 음악가들이 이런 극장음악을 천박한 것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존하던 두가지의 음악은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거치며 국악이라는 장르로 묶이게 되었고 서구에서 전해진 대중음악이 우리의 대중음악으로 대체 됩니다.
지금까지 역사속에서 보는 ‘정음’과 대중음악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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