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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판소리의 음악사 1편

판소리의 음악사

 

판소리는 언제 처음 형성되어 지금의 판소리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요? 구전심수로 전승되는 판소리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생겨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옛 문헌이나 기록에 의해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오늘은 판소리의 음악사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형성과정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정숙 명창의 판소리 공연장면

1. 형성기

판소리의 시초에 관한 자료나 기록은 없으나 판소리 명칭을 대신하였던 이름들은 몇 가지 문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본사가, 창악, 광대소리, , 잡가 등 다양한 명칭으로 쓰이다가 20세기에 들어서 판소리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습니다. 판소리의 형성 시점은 영조와 정조 때인 18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기록에 의하면 숙종 말에서부터 영조 초 시기에 하한담과 최선달 명창이 최초의 판소리 창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활동했던 광대는 하한담, 최선달 외에도 우춘대, 권삼득이 있었습니다. 또한 판소리에 관한 문헌으로는 만화본 춘향가로 영조 30년에 쓰였습니다.

판소리의 형성기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판소리의 12마당 창제입니다. 현존하는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5마당 외에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7개의 마당이 더해져 창제되었습니다.

 

 

이 당시 판소리가 단순히 음악적인 요소에 그치지 않고 서사성을 가진 극적 요소까지 확대하여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8세기 중엽 즈음 판소리에 관한 문헌에 의하면, 영조 때 궁중에서 판소리를 연행하였으며 이는 판소리의 향유층이 점차 양반계층에게도 확산되는 시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판소리의 형성기에는 자세하게 묘사된 기록은 없으나 판소리의 형성이 언제쯤 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고, 시초가 되었던 명창들에 이름 정도만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12마당의 창제와 더불어 판소리가 본격적으로 독립성을 가진 예술로 정착하여 궁중에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판소리 이론가의 등장 신재효

2. 전성기

판소리가 가장 융성했던 전성기는 19세기입니다. 이 당시 판소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바로 신재효였습니다. 판소리 역사에 신재효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판소리는 비약적인 발전과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재효(1812~1884)는 중인 출신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연구가로 판소리 광대들을 후원하며 교육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활동하던 김세종, 박만순, 이날치, 김창록 등 명창들에게 판소리 이론을 계승하였습니다. 또한 진채선, 허금파 등 여류 명창을 최초로 등장시키며 남성의 소리가 주류였던 판소리 행보에 파격적인 획을 긋게 됩니다.

 

 

 

또한 그의 업적 중 하나는 광대가라는 단가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광대가의 사설에는 바로 광대가 갖춰야 할 요건을 제시하였는데, 인물치례, 사설치례, 득음과, 너름새 4가지 항목을 제시하며 광대가 갖출 요건을 이론화하였습니다. 광대가를 통해 창자들이 갖출 기능과 예능을 이론적으로 제시하며 판소리 광대들의 이론 정립에 큰 기여를 하였던 인물입니다.

또한 그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사설로 정리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구전심수로만 전해오던 판소리를 창본으로 남겼다는 점은 판소리 전승과 계보를 잇는 것에 있어 큰 의미가 있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정리한 사설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박타령, 변강쇠타령입니다. 이러한 신재효의 업적들은 19세기 판소리의 전승과 연행에 그리고 이론 정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판소리의 전성기에 대한 내용들을 신재효 인물에 이어서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