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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국악을 이해하기 위한 조선후기 (1. 학문과 사상)

우리가 부르는 노래들은 대체로 조선 후기에 불렀던 노래들입니다. 왜 조선 후기밖에 안될까?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음악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이와 시대가 비슷합니다.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대와 문화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국악과 가장 관련이 깊은 시대인 조선후기의 사회를 소개합니다.

굳건한 성리학에 슬슬 반기를 드는 다른 학문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국악을 이해하려면 조선후기사회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고 듣는 전통음악은 대부분 조선후기의 음악입니다. 조선중기, 초기만하더라도 자료를 찾기 쉽지 않고 그 소리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아악과 정악에 대한 기록은 있다 하더라도 서민들이 부르는 노래, 일반인들이 부른 노래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조선후기의 구분은 대체로 세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병자호란 이후를 조선후기로 봅니다. 둘째는 붕당이 변질되기 시작했던 숙종시대부터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마지막으로 왕권이 강했던 영조-정조시대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교집합을 그려본다면 숙종~영조시대인 18세기 즈음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두 번의 전란은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는데, 그런 전란보다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지주였습니다. 막대한 토지를 재산으로 보유한 지주들은 조세재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노동력을 착취하고 조세부담은 백성에게 전가했습니다. 이 때 상공업이 발달하며 지주의 개념이 서서히 자본력있는 상인계층이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고려 후기에 우리역사 전면에 등장했던 성리학은 관학파에 의해 부국강병의 목적을 두었으나 조선중기에는 사림을 중심으로 학문적 이상향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학문적 파벌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분열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종교처럼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유교는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공자같은 중국의 성현들과 정몽주, 이황, 이이, 송시열 같은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시작했던 성리학이 변질되자 학계 곳곳에서 여기에 반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왔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양명학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양명학에서 주장한 여러 가지 중 가장 획기적인 주장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 폐지에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이 우리나라보다 앞선 청나라의 경제, 문화, 사회를 보고 조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합니다.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북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북학은 철학으로 세계를 인식한 성리학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객관적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하는 도구인 지도(곤여만국전도)를 이해하고 지구가 돈다고 하는 지전설처을 주장하는 등 세계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청나라에 사신이 가는 광경.... 박지원은 청나라를 가서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문물이 있음을 보고 왔습니다.

북학과 더불어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추구하며 시작한 학문적 접근법이 있었습니다. 북학보다 더 서양과학기술과 청나라의 고증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발전한 학문입니다.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실학입니다. 정약용은 한강에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놓기도 하고, 거중기(지금의 크레인과 같은 원리, 물리학, 역학적 사고가 반영됨)를 이용하여 수원화성을 축조합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학이 들어옵니다. 사신들에 의해 전래된 학문으로 받아드려졌으나 엄연히 종교적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서학의 종교성을 알았던 사람들은 서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천주교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천주교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으며 신앙활동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조정에서 천주교를 내버려 두면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가 유교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교 제사는 곧 신분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드려져 국왕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천주교 초기에 엄청난 탄압과 박해가 있었던 이유입니다.)

 

천주교가 확장되자 여기에 반발한 또 다른 학문이 생겨납니다. ‘최제우가 중심이 되어 벌인 사상인데 유, , 선의 내용과 민간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사상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시천주, 인내천 사상을 주장하며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시천주, 인내천은 누구나 하늘이고 누구나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와 여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주장하며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서양과 외세를 물리친다는 두 가지의 내용으로 호라동을 시작합니다. (후에 동학농민운동,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기존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던 성리학과 북학, 실학, 천주교, 동학이 있었던 사회. 조선후기의 사회는 서서히 근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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