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근대를 지나 현대로 들어오며 전 세계가 광기에 휩싸입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시아까지 확산 되었습니다. 1차대전에서 승전국 위치의 혜택을 누린 일본. 1920년대 신흥공업국으로 급부상하며 경제발전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이 때의 자신감 때문인지.....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발산합니다.
전쟁.....
1930년대 후반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세계 2차대전에 발을 담그게 됩니다. 그런데 중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늪에 빠집니다. 막대한 인력과 자본이 들어가게 되어 모든 초점을 전쟁에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 영향이 많아 모든 문화예술도 ‘전쟁’이 중심이 되어 버립니다. 극장의 많은 레퍼토리는 전쟁을 묘사하거나 징집의 정당성, 홍보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극장과 방송의 레퍼토리가 전쟁을 위한 곡들로 채워집니다. 일본의 군가들과 참전을 독려하는 노래나 연주의 빈도가 많아져 기존의 국악곡은 슬슬 설자리를 잃어가게 됩니다.
1940년대 전쟁에 사활을 건 일본의 집요한 수탈은 더 이상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일본도 문화산업에 더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 틈에서 서서히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습니다.
1945년 이후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국악이나 전통음악이 위치를 찾아갈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좌우 이념갈등이 심해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가고 50년에 민족의 비극, 6.25전쟁이 터지며 문화예술이나 국악이 자리잡기 어렵게 됩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오며 전통예술, 특히 우리의 소리는 설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전통예술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그 자리는 대중음악이 차지하게 됩니다.
전통문화의 보존
일제에 의한 강점기, 전쟁, 그리고 복구까지.... 국악이 대중에게서 멀어진 것은 음악자체가 가진 가치나 속성이라기 보단 사회적인 환경요인이 더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이후 우리의 문화에 대한 보존이 화두에 오르기 시작되며 의미있는 제도가 만들어집니다.
소수에 의해 명맥을 유지했던 우리 국악은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기면서 보존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교육, 문화에서 국악은 무조건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며 한국의 정체성을 높이는 중요한 예술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무형문화재는 예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제도로 전승도 가능하다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현재의 국악인들은 대부분 ‘무형문화재’ 스승에게 배운 국악으로 활동하며 전수를 받거나 이수를 받으며 기능보유자가 됩니다.
최근 여러 국악인들의 노력
최근 이날치의 활약으로 국악이 조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국악의 세계화를 이끈 사람들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서양에서 활동한 작곡가 윤이상은 국악의 요소를 독일식 현대음악에 도입하여 농현과 정악의 미분음(서양관점)을 서양음악으로 표현하여 주목을 받습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un총회에서 정명훈씨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우리 국악이 가진 흥과 신명을 전 세계인 앞에서 펼쳐보였습니다. 또한 우리 국악의 아름다움을 선보인 임권택감독의 ‘서편제’도 국악을 널리 알린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퓨전이라는 장르를 실험한 여러 단체와 국악인들의 노력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속으로 들어온 경우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송소희, 송가인처럼 이미 대중음악에서 국악의 멋스러움을 잘 살리며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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