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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경기잡가의 흥행과 발전

경기 잡가가 가장 성행했던 때는 언제일까요?

대중음악처럼 경기잡가가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근대시대의 이미지는 컴컴한 흑백입니다. 흑백사진 자료들을 봐서 그렇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아픔, 나라를 빼앗긴 감성, 항일투쟁을 이어간 독립운동가들이 오버랩 됩니다. 일제가 행했던 각종 만행과 억압들, 그리고 수탈을 생각해보면 마음 한켠이 어두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문화적, 예술적으로 큰 전환기이기도 했습니다. 개항 이후 수많은 열강들이 한반도에 들어오며 각종 문물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중에 음악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유성기일 것입니다. 서양악기가 들어오는 것이 우리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성기는 국악에서도 요긴하게 쓰인 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성기로 녹음이 시작되고, 음반이 발매까지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1927년엔 라디오 방송까지 시작이 되며 본격적으로 국악이 많이 보급되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우리의 전통 소리, 경기잡가가 유행했던 시기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미디어의 발달

유성기가 들어오는 것과 함께 출판업계도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많은 간행물들이 나오는데 다양한 신문과 잡지들이 발간되며 우리 소리에 대한 정보도 빠르게 대중에게 전달됩니다. 방송국과 간행물들이 있으니 국악이 전파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처음에는 국악의 방송횟수가 많지 않았지만, 30년대 들어서는 방송횟수가 많이 증가하였으며 40년대까지도 방송의 비율이 제법 높았습니다. 주로 30년대에 많이 방송이 되었던 것으로 보면 그 시기가 거의 전성기라고 볼만큼 대중이 좋아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경기잡가는 국악에서 매우 비중이 높았다고 합니다.



사랑받는 레퍼토리

다양한 곡들 중에 제비가의 방송이 가장 많았으며, 경기잡가에서도 가장 인지도 높은 소춘향가, 유산가, 집장가 같은 곡들도 꾸준히 방송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디어는 다양한 곡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었으며 항상 대중의 기호와 방송의 반응을 살피기 때문에 몇몇 인기 있고 유명한 곡들 위주로 방송이 되었습니다. 거의 1940년이 돼서야 12잡가가 방송이 되었습니다.

 

방송은 유성기음반이 될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녹음방송보단 실황인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이 당시 인기 있었던 소리꾼은 박춘재’, '소완준', '한인학', '최정식' 등 당대 최고로 꼽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초장기에 활동하던 인물중엔 박춘재가 가장 많이 활동하였습니다.

 

소리꾼 박춘재

1910년부터 20년대까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며 경기소리를 대표하던 소리꾼은 누구나 박춘재를 꼽습니다. 박춘재는 잡가를 주로 불렀는데 왠만한 잡가집은 박춘재를 내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잡가 외에도 연극에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박춘재의 활동이 탁월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다각도로 유명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리 외에 관객들과 벌이는 재담에서 들어납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가 녹음한 음반을 통해 여러 잡가와 재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판소리를 하진 않았지만 12잡가부터, 휘몰이잡가, 가곡, 가사, 시조 같은 정가들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였으며 다른 소리꾼 보다 청이 높아 시원시원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울러 잡가에선 다양한 장구장단을 활용하여 보다 듣는 재미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박춘재가 조금만 일찍 활동했었더라면 우리는 그의 소리를 상상 속에서만 가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성기 음반이 제작되던 시대에 활동을 했으며 다양한 레코딩을 했기 때문에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당대 경기소리를 가장 많이 녹음한 소리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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