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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근대화 시절 경기 소리의 음반 (1편)

요즘시대엔 노래를 듣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옛 시절 경기소리의 음반이 있었을까요?


전승의 시대에서 기록의 시대로

음원사이트, 유튜브 등 요즘은 노래를 듣기 좋은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에 유성기가 들여온 것은 대략 1890년대로 추정됩니다. 유성기 음반은 1896년에 처음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소리를 저장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미술, 공예, 문학 같은 다른 예술분야는 그 기록이 쉬워 옛날 시대의 결과물을 알 수 있으나 음악은 악보형태의 기록물 외에는 예전의 원형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리를 담는 기계인 유성기가 나오기 전까진 소리를 담아내는 작업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1800년대 중반에 유성기를 발명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을 기록하고 담기 시작합니다.

옛날 경기소리의 음반이 녹음되었다고 하는데....

 

 

 


초창기의 레코드는?
우리나라 노래들도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하는데요. 길이가 길지 않은 노래들이 주로 담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유성기 음반은 보통 10인치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한 면에 3분정도만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이가 긴 노래나 정가보다 비교적 길이가 짧은 노래들이 선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양음반은 대부분 12인치로 제작되어 이것보다 긴 4~5분가량 음악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유성기 음반이 처음으로 나온 1896년부터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1945년까지 음반의 발매 현황을 살펴보면 대략 7000여개가 되는데, 여기에 서양의 음반과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을 포함한 숫자입니다.

초창기의 축음기는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녹음기술은 '파격'그 자체였습니다.



경기소리 녹음

국악에서는 경기소리가 비교적 많았다고 합니다. 앞서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울, 경기 지역은 정치, 경제, 문화 중심에 있었고 노래를 수집하거나 담기에 좋았습니다. 따라서 경기소리는 유성기 음반으로 발매된 곡들을 살펴보기가 비교적 수월합니다.

 

1886년 발매된 음반에서 녹음된 노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통속민요인 아리랑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경기민요 중 유명한 노래인 매화타령이 있습니다. 이 노래들은 미국에서 취입된 노래입니다. 이후 경기소리는 우리나라에서 녹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광무개혁이 있은지 2년 뒤 1899년에는 선소리패에서 활동하는 선소리꾼들이 유성기 음반을 녹음하였습니다. 춘향가, 기생화용 및 금랑의 가사, 진고개패 계집 산홍과 사나히 학봉의 내용이 들어있는 잡가를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그 때 발간된 독립신문에 자세히 나와있는데요. 이 당시 광경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신기하고 기이하다고 선소리패를 칭찬하고 온 종일 놀았다고 나옵니다.

 

선소리패의 노래 이후 여러 경기소리 명창들이 음반을 취입했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의 음반은 애석하게도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때 대한제국(광무개혁이후)의 황제 고종은 지역의 있는 경,서도 명창들을 불러 음반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근대시절 축음기는 부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외국음반사와 녹음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 1900년대는 일본 경제는 호황을 맞이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주목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콜럼비아사가 같은 서구의 음반회사들이 일본에 진출하는데 콜롬비아사는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며 많은 유성기 음반을 제작하게 됩니다. 다만 한국음악은 대체로 오사카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적벽가, 주유가, 유산가, 적벽가 같은 잡가들과 황계사, 남초가, 효녀심창가등 남도판소리와 잡가입니다.

 

미국의 빅타사도 이 때 일본으로 진출하여 음반을 녹음하는데 대략 1907년 이후에 녹음이 되었다고 합니다. 소춘향가, 적벽가, 유산가 등 당시에 인기가 많았던 경기잡가가 유성기로 녹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