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

판소리의 5명창 2. 고고천변의 동편제 송만갑

증조 할아버지가 가왕 송흥록, 할아버지는 송광록, 아버지는 송우룡인 판소리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가문이 대대로 동편제를 이어왔기 때문에 송만갑이 소리꾼이 되는 건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송만갑의 스승이었으며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소리의 기본기를 확실하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혹독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린시절 가볍게 재미삼아 소리를 했던 전주대사습놀이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놀이에 참여했던 수많은 청중은 그의 소리를 듣고 감탄하였고, 그 때 송만갑은 소리는 청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이후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하기 시작하였고 청중을 위해서, 그리고 소통을 하는 것에 중요성을 알고 다양한 소리를 받아드리기 시작합니다.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온 동편제의 틀을 서서히 벗어나며 다양한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4대째 동편제를 이어가던 가문에서는 이러한 송만갑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문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소리를 계승할 의지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송만갑은 제명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음에도 그의 소리를 향한 탐구는 계속되었고 경기도의 경제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서편제의 명창 정창업의 소리를 듣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동편제의 기반, 경제의 활용, 그리고 서편제의 소리를 가미하여 자신만의 소리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발림을 하는 소리꾼 (창 정용훈, 고수 정철호)

청중을 위한 소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서편, 동편, 경기는 그가 소리를 하는 토대였으며 이 사이를 넘나들고 어느 것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리로 인한 갈등은 늘 집안이나 동편제를 계승하던 사람들 하나의 소리를 깊게 했던 사람들과 있었습니다. 집안에선 이단아였고, 동편제를 계승하던 동료들에겐 그의 행보는 이해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청중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고 치밀하고 정교한 음악적 표현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조정에서 그를 원각사 간부로 임명하였으며 고종 앞에서 어전 공연을 펼치는 기도 했습니다. 원각사가 폐쇄된 이후에도 궁내부에서 일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조선이 기울어가는 시기였지만 그는 왕실의 일을 열심히 하였고 민영환과 함께 청나라와 미국을 함께 다니기도 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 하였습니다.

 

그가 왕실에서 받은 벼슬은 감찰이라는 직위었습니다. 그래서 송만갑의 소리를 두고 감찰제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송만갑의 업적은 창극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판소리는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송만갑은 판소리를 더욱 개량하여 창극으로 발전을 시켰습니다. 판소리 5대명창으로 꼽히는 동료들인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과 함께 활동을 하였는데 조선성악연구회, 협률사 활동을 활발하게 했습니다. 협률사는 송만갑이 직접 만든 단체로 창극을 개량하고 발전시키는 단체였습니다.

명창 한승호

송만갑의 소리는 통성으로 지르는 소리가 유명하며 상당히 높은 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을 높게 가지고 있는 것은 상당한 장점인데 그 소리들도 통성으로 낸다는 것은 보통의 목으론 불가능합니다. 송만갑의 소리는 지금도 전해지는데 우리는 그의 생생한 소리를 유성기 음반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명반을 남겨 그의 모든 녹음은 역사적으로, 학술적으로, 예술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수궁가 고고천변입니다.

호쾌하고 화려한 송만갑 명창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