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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선사시대의 사회와 문화예술 1. – 학생들을 위한 한국사 이야기

문화예술은 사회에 필요 없는 것일까요? 간혹 우리 인생에 문화예술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은 어떻게 시작된 것이고 무엇을 위해 우리 삶속에 있는 것일까요? 역사를 통해 문화예술의 자취를 탐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사시대 역사

선사시대란?

선사(先史)라는 말은 역사 이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선사시대는 역사가 아닐까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록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선사시대를 어디서부터 정의 할건지는 난감합니다. 지구의 탄생, 인류의 등장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동지역을 비롯하여 한반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70만년 전이라 하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그것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사시대의 역사는 대체로 인간의 자취를 추적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 자취는 바로 도구입니다. 도구를 통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파악하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아보는 역사가 바로 선사시대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시대이나 그만큼 가장 가슴 뛰게 만들고 설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사료량이 충분하지 않아 출토되는 유물에 따라 언제든 순식간에 학설이 뒤바뀔 수도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 ‘도구

박물관에 가면 선사시대의 유물은 돌맹이들입니다. 때로는 어디 공사장 한켠에 있는 돌을 전시해 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도구들은 아무 곳에 흩어진 것이 아니며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있던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됩니다. 강변, 동굴, 바위그늘에서 발견되는 유적이 있는가하면 강가, 바닷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움집에서 발견된 것이 있습니다.

 

장소별로 출토되는 유물의 특징이 있었는데 재료의 특징, 가공의 특징이 있었으며 이것을 토대로 우리는 3~4개의 시대적 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최대 관심사는 먹고 사는 일입니다. 식량을 구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것이며,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의 안정성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도구도 , 생존과 연관된 용도가 나옵니다.

전곡 주먹도끼는 정말 중요합니다.

 

소박한 삶 구석기시대

돌을 도구로 삼아서 활동을 하는 시대를 석기시대’(Stone Age)로 부릅니다. 가공기술이 덜 발달 된 것 같은 시대엔 주로 사냥도구(주먹도끼, 찍개), 조리도구(자르게, 긁개, 밀개)가 많았고 신석기로 전환될 때쯤에는 돌날격지, 슴베찌르개(사냥도구)를 통해 가공기술이 발달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주로 동굴, 바위그늘, 강가에서 생활했음을 유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동굴이나 바위 그늘처럼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강가에선 안정적으로 물을 얻을 수도 있어 거주하기에 좋습니다. 반면 깊은 산속에는 거주하지 않았는데요. 야생동물의 습격, 산사태의 등 거주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강은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합니다.^^

 

생각을 표현한다!! - 예술의 흔적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말과 행동은 직접적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인데 조금 더 추상적이거나 함축적 의미를 담은 표현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충북 단양에 가면 유명한 구석기 시대 유적이 있습니다. 충남공주 석장리에서도 이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에 사람들의 관심은 동물에 있었습니다. 사냥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물고기, 사슴, 맷돼지 같은 동물의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관심사를 표현합니다. 구석기 유적을 사냥과 채집의 소박한 꿈을 가지고 살았으며 때론 이런 그림이 주술적 의미를 담아 풍요와 안정을 기리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술은 생각의 표현입니다. 생각은 우리의 삶에서 나오므로 삶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구를 통해 사람들의 일상을 추적할 수 있다면, 예술을 통해선 사람들의 생각과 감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적지의 그림이나 조각들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삶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첫 번째 대혁명! - 신석기시대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던 구석기시대에 비해 신석기의 유물들은 삶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증명합니다. 사냥과 조리에 국한되었던 도구들이 가락바퀴, 뼈바늘처럼 수공업, 공예를 의미하는 물건이 등장하였고, 돌보습, 굴지구 같은 농기구가 출토됩니다. 조리도구도 변화하여 갈돌, 갈판처럼 투박했던 구석기의 물건보다 정교한 물건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토기가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토기는 음식을 담거나 저장할 때 주로 씁니다. 그래서 신석기 부터는 정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농경시작’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축사육’입니다.

 

정착의 흔적

농사를 짓고 가축을 사육하는 일이 병행되었으나 아직 수렵과 채집, 사냥이 경시된 것은 아닙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물이 절대적이며 비옥한 토지를 응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조리방법도 많이 바뀌어서 주거가 놀랍게 변합니다. 구석기 시대는 사냥이 좋은 장소로 이동하며 거주하였으나 신석기 시대는 정착을 하게 됩니다.

양양 오산리 유적의 움집 - 출처 문화재청

땅을 파고 집을 짓는 형태의 움집이 생겨나는데 우리나라는 1m정도 땅을 파고 집을 만들었습니다.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을 갖추어 추운겨울도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하였고, 움집의 규모로 추정해보면 대략 4~5명의 가족이 움집에 거주하며 생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을 넘어 종교로 발전하는 예술

단순히 풍요를 기원하던 의미로 새긴 동물의 모습은 사람의 모습을 빚은 토우짐승의 뼈와 이빨로 만든 장신구인 치레걸이조개껍데기로 만든 가면으로 발전합니다. 조상이나 영혼을 숭배하고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의 형태로 종교의식과 결합된 예술조각, 그림이 나오며 예술의 영역은 생각과 이상향, 믿음, 신념 등을 표현합니다.

 

 

무역이 있다고? 교류의 흔적

신석기 유물에서 흑요석을 재료로 하는 도구가 출토되어 놀라움을 주었는데요. 흑요석은 화산석으로 백두산 인근과 일본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흑요석기는 당시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한반도 중부와 북부에서는 백두산에서 나온 흑요석과 일치합니다. 그 당시 어떻게 먼 바다를 건넜을까는 미스테리 중 하나입니다. (마치 바이킹 신화 같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엔 해양과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많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