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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최초의 국가 고조선

신석기 혁명 이후 사유재산의 개념이 생기며 빈부격차, 계급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활발히 벌어지던 부족간의 정복전쟁도 사회적 격차를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각 부족 사람들은 더 이상 부족끼리 살기 어려웠고 정략결혼, 정복전쟁을 통해 세력을 크게 합니다. 이렇게 부족과 부족이 합쳐지며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그 나라의 이름은 바로 조선입니다. 그러나 1500년 정도 뒤에 조선이 또 세워지므로 사람들은 옛고()자를 앞에 붙어 고조선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고조선의 기록

우리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삼국유사, 제왕운기가 최초입니다. (고려 충렬왕시대) 그러나 이미 천년도 훨씬 더 지나서 기록한 것이므로 실제 고증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고조선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단순히 전해 내려온 이야기만으론 역사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인 옛중국 역사에 고조선이 당당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고조선이 현존했을 때 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관자(B.C. 7c)는 고조선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책이며 현존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고기’, ‘위서’, ‘구당서’, ‘산해경’, ‘사기’, ‘한서같은 책,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삼국지에서도 고조선이 나오며 후한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조선의 위치와 세력범위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과 함께 금지 되는 것은 사료적 근거 없는 추측입니다. 고조선의 범위는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요령지역부터 한반도 북부, 요동지역 일대에 세력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고조선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4가지 유물이 출토된 지역으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탁자식고인돌, 미송리식토기, 거친무늬거울, 비파형동검의 출토 범위가 고조선의 범위로 볼 수 있습니다. 넓게는 요서지방, 산둥반도 포함 할 수 있는데 이는 역사에 기록된 동이’(고조선 사람을 지칭했던 옛 중국인의 말)가 살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강화에 남아있는 북방식 고인돌 터

한국의 청동기 = 고조선

고조선의 문화는 청동기 사회입니다. 우리 역사에선 고조선이 B.C.233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이야기 한 것인데,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청동기 유물의 시점, 청동기문화가 시작했던 시점과 비슷하게 나오는 것으로 확인하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고 우리 역사의 시작 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단군과 관계있는 마니산(강화)의 첨성대

역사 속 고조선 = 철기문화

고조선이 서서히 주변나라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B.C. 4c 경입니다. 중국으로부터 철기 문화를 들여오고, 왕위, 국가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이 때는 많이 강성하여 중국의 연나라와 대립하였고, B.C. 3c경에는 왕위세습(부왕-준왕)이 일어나며 왕권이 강해집니다. 왕권이 강화되자 신하들의 관직, 국가회의가 열리는 등 중앙집권체제로 발전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연나라의 침공은 계속되었으며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으로 요서지방의 영토를 상실하고 맙니다.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책입니다.

수도 왕검성은 대동강 유역으로 옮기면서 강성하던 고조선의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중국에게 고조선을 빼앗긴 것인가? 위만조선과 기자조선

춘추전국시대는 진나라가 통일하며 막을 내립니다. 통일이 되면 어떤 나라든 혼란기를 거치게 됩니다. 고조선에 뿌리를 둔 동이족이 대규모로 고조선으로 이동합니다. 이 때 고조선에서 서쪽의 경계를 맡은 위만은 그들을 받아드림으로 세력을 키우고, 왕검성으로 이동하는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준왕에게 왕위를 빼앗고 위만이 왕이 됩니다. 이 때부터 시작된 조선을 위만조선이라 합니다.

 

위만은 중국에 살던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그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왕을 몰아낸 것이므로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인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고조선 사람이며, 그들이 왕검성에 왔을 때도 고조선의 의복을 입었으며 국호를 조선으로 유지하였습니다. 또한 위만의 시대에 관직에 오른 사람은 대부분 고조선 토착민들입니다. 따라서 위만이 통치하던 시대는 우리의 역사가 맞습니다.

기자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가장 성행한 것은 16c로 우리문화의 원천을 중국에 있다고 보는 존화주의적 역사인식이 만연했던 시기에 비롯되었습니다. 성리학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옛 성현은 대부분 중국역사에서 나온 사람들이므로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나라 왕이 고조선의 기자를 고조선의 통치자로 임명했다는 내용인데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나라 역사 일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근거 자료나 턱없이 부족하고 여러 가지로 오류가 많습니다.

 

 

끝이 아닌 시작이 된 고조선의 멸망

위만이 통치하며 고조선은 매우 강해졌습니다. 이미 B.C, 4c경 들어온 철기문화가 더욱 본격적으로 수용되며 철제농기구가 많이 보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철제 무기를 가지고 세력도 확장하며, 흉노와 연계하여 중국의 한나라와 대립하고,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취했습니다. 한나라는 고조선이 날로 강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한무제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오히려 고조선이 크게 승리를 거둡니다. 쓰라린 패배를 맛본 한나라는 절치부심하여 2차 침공을 개시합니다. 1년동안 한의 침략을 잘 막았는데....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지배층이 분열되면서 동력을 잃고 왕검성이 함락되었습니다. B.C. 108년 고조선이 멸망했습니다. 한나라는 4개의 한군현을 설치하고 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좋지 않았고 사회를 각박하게 만들었습니다. (고조선 유민들의 저항 공격이 있었고, 고구려가 한군현을 전부 없앴습니다. )

고조선의 역사는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고조선의 살던 사람들은 한군현의 압제에 못이겨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갑니다. 이렇게 퍼저나가며 삼한이 생기고 한반도 각지에 국가들이 하나씩 생겨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러 나라가 생기며 본격적인 고대 국가 시대로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