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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판소리의 5명창 1. 전설적인 ‘제비노정기’를 부른 서편제 김창환

판소리 5명창

 

1930년대 국악 음반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가장 있기가 많았던 것은 판소리 음반들입니다. 암울한 시대지만 이 시기에 활동했던 소리꾼들은 조선 후기의 소리를 직접 접했으며 서양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1900년대 전통과 현대의 흐름에서도 우리 소리를 제대로 지켰던 명창들입니다. 수많은 명창이 있었으나 특히 우리는 5명의 소리꾼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당대의 5손가락에 꼽히는 이 사람들은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명창입니다.

예술은 뛰어난 선배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후배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완성하거나 덧붙이며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요. 5명창의 기량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 후대의 명창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운인 것은 5명창은 1930년대에 예술의 꽃을 피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수준높은 기량과 예술성을 가졌습니다. 이 시기가 5명창의 마지막 활동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930년대 후반에 돌아가시거나,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김창환 명창

서편제의 대표주자이자 5명창 중 가장 연배가 있었던 소리꾼입니다. 또한 5명창 중 최고 원로이자 가장 상징적인 판소리꾼입니다. 이미 1900년대부터 탁월한 기량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판소리의 선배로써 많은 소리꾼들을 이끌었다고 전해집니다. 한창 민란이 일어나던 시기인 1855년 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정창업명창에게 소리를 배웠습니다. 소리꾼 김창환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신재효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당대 서편제 명창인 신재효는 재능있던 김창환에게 소리와 발림을 가르치며 공연에 힘이 실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창환은 명창 이날치, 박기홍과 이종 간으로 어려서부터 소리꾼의 DNA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902년 원각사의 주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고종을 비롯한 왕실에서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 결과입니다. 원각사가 폐지되기 전까지 (1909년 폐지) 원각사 공연에서 최고의 인기를 가진 소리꾼이었습니다.

 

김창환제를 확립한 그의 '더늠'

그가 남긴 자료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흥보가제비노정기’, ‘중타령입니다. 특히 제비노정기는 동편, 서편을 가리지 않고 그의 소리를 참고할 정도로 뛰어납니다. 판소리는 서양음악처럼 정해진 악보가 없으므로 소리꾼이 자신의 방식으로 다듬어 부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다르게 부른다고 예술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스승의 것을 그대로 따라부르려 해도 따라 부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판소리에선 대목마다 자기 방식으로 다듬어서 다시 부르고, 또한 가장 잘 부르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을 바로 더늠이라고 합니다.

 

김창환의 더늠김창환제를 확립시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동편제 박록주, 동편제 성운선은 김창환을 스승으로 모시고 흥보가’ ‘제비 날아드는데를 스승을 따라 스승의 방식으로 부릅니다.

판소리는 북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공연이 가능합니다. (소리꾼 박동진)

우리는 그의 소리를 1930년대 유성기 음반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콜럼비아에서 녹음된 고고천변, 중타령, 제비노정기는 아직 건제합니다. 이 음반들은 서편제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