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의 음반에 대해
우리 역사에서 전통을 단절시킬 정도로 혹독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 말~1945년까지 일제의 태평양전쟁이 첫 번째 시련입니다. 그리고 1950~1953년에 벌어진 6.25전쟁입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이 순간은 매우 힘들었고 후유증도 심각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전면에 나오면서 누구도 공연예술에 시선을 둘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국악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으로 우리 전통은 훌륭하게 계승되었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노력과 함께 국악이 보존될 수 있었던 중요한 물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930년대 나왔던 ‘유성기’(축음기)음반입니다. 1910~20년대의 유성기 음반들도 보존되어 있으나 녹음기술이나 유성기를 제조하는 기술력이 부족하여 만족할 만한 음질로 감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의 일본의 음반회사들은 서구의 기술들을 도입하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퀄리티의 음반들을 발표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회사들이 음반을 제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국악을 즐기고 사랑했던 한국인들 덕분입니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음반회사들이 가장 돈이 되는 음악을 찾았는데 당시의 한국인들은 국악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1930 음반의 특수성
1930년대의 음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술이 부족했던 1910~20년대보다 좋은 소리를 담아낸 명반이 많았고, 둘째, 일제의 전쟁으로 수탈이 심했던 1940년대, 혼란스러웠던 1945이후, 전쟁이 발발한 50년대엔 음반을 제작할 여력이 없었으며, 셋째, 조선시대의 음악을 계승한 명인, 명창들이 이 시대에 많은 녹음을 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의 음반은 조선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명인들과 서양음악을 접했던 새로운 시대의 조류가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음반은 다양한 장르를 다루고 예술적 가치가 높습니다. 또한 이 시대는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았으므로 평안도, 경서도 소리의 자료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민속음악 - 경서도소리
학술적으로나 예술성으로 볼 때 민요나, 경서도 소리는 형식이 간결하고 짧고 가락도 대중적이라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엔 경서도 소리는 현재의 대중가요 만큼이나 인기가 있었고, 우리소리의 주류라 할 정도로 방송횟수, 공연 횟수, 음반의 양 모든 것에서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불렀던 경복궁타령, 창부타령, 수심가 같은 레퍼토리외에도 경기 긴잡가도 상당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 때 가장 활약한 소리꾼은 단연 ‘박춘재’입니다. 당대에 재담의 명수이기도 했던 박춘재는 선소리산타령, 방아타령 등 다양한 민요와 재담소리 등이 남아 있습니다. 김종조와 최순경의 배뱅이 굿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명반인데요. 김종조의 배뱅이 굿은 경기소리와 남도소리를 섞어가면서 독특한 표현을 하였으며, 최순경은 당대 서도소리 최고의 명창인 만큼 서도소리 방식으로 불렀습니다. 그 덕분에 최순경의 음반은 지금도 서도소리를 연구하는 것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그 외에도 신해중월의 무가 음반, 이영산홍의 서도소리, 하용남의 불교음악 등을 명반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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