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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격동의 시대를 지낸 소리꾼들

 

가장 어려웠던 시기, 우리 국악의 맥이 끊어질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 일어납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우리 소리꾼들의 활동이 위축되었고 권번이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광복을 맞이하여 국악이 일시적으로 부흥하는 듯했지만 극심한 이념대립은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터진 6.25...... 국악은 더이상 설자리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전쟁의 흔적은 우리 삶을 생존의 문제로 끌어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시기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힘겨운 시대 우리 국악을 지킨 소리꾼들이 있습니다.

 

이창배(1916~1983)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경제부흥이 있던 시기까지 살았던 소리꾼입니다. 그의 생애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함께 한 것인데요. 그만큼 굴곡 많았던 시대에서 그가 했던 일은 상당히 많습니다. 이창배는 조선후기부터 이어진 소리를 계승하고 후대에 가르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스승인 최경식(1876~1949)을 계승한 것이 대표적인데요. 최경식이 활동했던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사계축의 소리를 생생하게 배웠기 때문에 이창배의 활동은 역사에 남을 만합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스승 이명길로 부터 선소리 산타령을 배우고 원범산에게 잡가, 시조, 서도창을 배우며 다양한 소리를 잘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창배는 활동을 많이 했던 소리꾼입니다. 일제 강점기 후반1937년 청년 이창배는 조선가무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44년 부터는 조선가무단원으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였습니다. 광복 이후에 전쟁이 터지며 난리가 났었는데요. 그 때도 이창배는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일하며 우리 소리에 대한 여러가지 일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쟁 후에도 제자를 양성하고, 단체를 설립하는등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한국가창대계, 가요집성, 중보가요집성 같은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정득만 명창과 함께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요. 이 둘은 자칫 끊어질 뻔한 국악의 맥을 훌륭하게 이어줌으로 조선후기의 소리가 현대까지 이어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남자 소리꾼 중에는 이창배와 정득만이 이 시기에 빼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묵계월 (1921~2014)

비교적 최근에 돌아가셨지만 그의 소리의 시작은 조선권번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상당히 유서가 깊습니다. 당대에 경기 12잡가를 잘부르는 소리꾼 주수봉, 그리고 명창 최정식에게 서도창과 민요를 배웠습니다 조선 권번이 가장 활성화 되었던 시기여서 시대의 명창들과 만나 소리를 연마하고 익혔습니다.

 

묵계월 명창역시 조선 후기의 소리를 직접 전수받은 사람으로 전통과 현대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였습니다. 명창 안비취, 이은주와 함께 민요를 많이 불렀고 경기소리와 경기민요가 오늘날 조직화 되는 초석을 닦았습니다.

 

묵계월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송서입니다. 송서는 옛 선비들이 글을 익히거나 즐길 때 노래처럼 가락을 넣어 읊조리면서 만들어진 성악입니다. 옛날 전통사회의 학문과 글, 그리고 음악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설기, 등왕각서, 추풍감별곡 같은 소리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계월은 이중에 삼설기를 이문원에게 배워서 잘 부른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늘날엔 송서가 거의 전파되지 않아 묵계월의 송서는 우리 국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영임 등 걸출한 소리꾼들이 묵계월 명창에게 배웠으며 그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그의 소리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안비취(1926~1997)

경기민요에선 묵계월과 자주 비교되지만, 함께 다양한 소리를 하며 경기민요를 이끌어간 소리꾼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권번과 소리꾼들이 대체로 그랬듯 안비취 역시 여러 명의 스승을 만나며 다양한 소리를 배웠습니다. 가곡, 가사, ,서도잡가, 휘모리잡가, 민요 등 여러 소리를 익히고 연마하였습니다. 그녀를 가르쳤던 소리꾼들은 당대의 명창들이었는데 당대에 가곡으로 손꼽혔던 가곡의 대가 하규일, 가곡, 가사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이병성, 그리고 국악계의 거목이었던 최정식, 그리고 함께 활동을 하기도 했던 이창배, 정득만이 있습니다. 또한 무용의 대가인 한성준에게서 한국무용을 배워 소리와 함께 무대에서 표현하는 몸짓에서도 예술성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비취라는 이름은 사실 본명이 아니고 예명인데요. 스승인 최정식이 붙여준 이름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다른 명창과 다르게 안비취 명창은 6.25. 이후 음악활동을 활발하게 했습니다.(그 전에도 하긴 했으나 활발한 활동은 전쟁 이후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국민속예술단을 조직하고, 전국민요경창대회를 개최하는 등 우리 국악 저변을 넓히는데 힘썼습니다. 안비취의 소리는 이춘희, 김혜란, 이호연 명창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정득만(1907~1994)

일제강점기시대 우리 소리를 지탱했던 가무연구회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리꾼들은 가무연구회를 통해 여러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이 재물을 원한 것도 아니었고, 일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우리 소리를 위한 일이고 우리 백성에게 우리 소리를 들려준다는 하나의 목표가 소리꾼들을 움직였습니다. 이 때 가무연구회에는 걸출한 막내 두명이있었으니 한명은 이창배 였고, 다른 한명이 바로 정득만입니다.

 

정득만 역시 조선후기의 소리를 직접 계승한 사람입니다. 가무연구회엔 기라성같은 소리꾼들이 대거 활동했기 때문에 정득만, 이창배는 그들의 소리를 직접 보고 들으며 많은 것을 익혔습니다. 소리의 자질이 뛰어나고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정득만이나 본격적인 소리수업은 20세가 되어야 시작됩니다. 스승 문세근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정규 과정을 밟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후 최경식 명창(최경식 명창의 진가는 그가 양성한 명창들에 의해 입증됩니다)에게 가사를 배우고 소완준에게 산타령을 배웠습니다.

 

정득만과 이창배는 영혼의 투톱이라 할 만큼 서로를 잘 이해했고 함께 여러활동을 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명창 중 경,서도 소리에선 이 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제자 양성과 활발한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산타령에 관해서는 정득만과 이창배 두 명창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원래 산타령 자체가 엄격하게 정해진 노래가 아니고 지역색이 가미된 만큼 둘의 스승인 이명길, 소완준이 부르던 방식이 완전히 다름에서 기인합니다.

 

정득만의 지르는 목은 당대에 두고두고 화자되는데요 어느 소리꾼도 그의 목을 흉내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정득만의 목은 타고났으며 선천적으로 타고난 소리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배우기 어렵다는 적벽가, 제비가, 평양가에 뛰어났고 높은 청을(음역)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소리를 구현했습니다.

 

정득만은 여성소리꾼인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를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만큼 정득만의 청은 여성소리꾼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