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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경기소리명창 –4. 근대와 일제강점기의 소리꾼들

 

우리 소리를 이끌었던 명창들을 소개합니다.

시대는 가장 암울하였으나 우리 소리의 중흥을 이끈 사람들로 우리 전통예술이 찬란하게 빛나던 시기였습니다. 유성기와 방송국, 극장이 설립되며 우리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다양한 소리꾼들이 활약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경성방송국의 기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지금부터 다양한 소리꾼들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우리 국악을 널리 알린 소리꾼들을 소개합니다. - 사진출처 한겨례신문

재담의 1인자 박춘재

1900~1920년대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소리꾼입니다. ,,박으로 불리는 사계축의 명창 중 2명을 사사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홍필원, 홍필관 형제로부터 소리를 배웠다고 하는데요. 잡가와 선소리를 배우며 소리를 즐겼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소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한자를 배워 노랫말을 배우는 것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설적인 두명의 소리꾼을 만나는데요. 처음으로 박춘경을 만나 시조와 잡가를 배웁니다. 당대의 명창으로 손꼽혔던 박춘경에게만 배워도 어마어마한 일인데 이어서 조기준을 사사하여 가사와 여러 가지 소리들을 배우게 됩니다.

 

 

4명의 좋은 스승과 타고난 자질, 본인의 노력으로 인해 시조, 가사, 잡가, 선소리등 다양한 소리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박춘재는 소리만큼 뛰어난 재주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당시에 재담은 박춘재를 따를 자가 없다고 할만큼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이런 성공을 배경으로 1900년 궁내부 가무별감으로 임명됩니다. 왕실의 음악을 담당하는 직위로 왕이나 왕실의 음악을 담당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국권 피탈 이후로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성방송국에서 그의 소리는 자주 나오는 레퍼토리었으며 유성기 음반도 여러장 녹음하며 많은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해방 후 3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의 소리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시절로 국한되나 여러 제자를 남겨 소리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오영근, 김경호, 박천복이 그가 가르친 제자입니다. 박천복에 의해 그의 소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연예인급의 인기를 누린 소리꾼 '박춘재'

대한국악원의 설립자 최경식

우리나라가 강화도 조약을 맺었던 해에 태어나 6.25 한 해전인 1949년에 세상을 떠난 소리꾼입니다. 일생이 근대시대와 함께 있었으니 그의 소리도 그 때를 위한 것입니다. 최경식은 지금 정가로 분류하는 가곡,가사,시조를 잘 부른 명창으로 기억됩니다. 그는 사계축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현재의 공덕동(서울시 마포구)에서 자란만큼 그에게 추,,박의 영향을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소리를 좋아했고 자기 동네에서 활약한 소리꾼 조기준을 찾아가 배우기 시작합니다. 조기준으로부터 사설지름시조와 가사를 배움으로 정가에 대한 기본기를 익혔고 이후 박춘경으로부터 잡가를 배워 스팩트럼을 넓혔습니다.

 

그는 제자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사례를 받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많은 서울의 소리꾼들을 가르치며 경기소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의 제자는 유개동, 이명길, 엄태영, 이창배, 정득만 등 내노라하는 유명한 소리꾼들입니다. 광복후엔 함화진, 박헌봉 등 몇몇 소리꾼들과 대한국악원을 결성하였고 한 때 국악가무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학식이 뛰어난 소리꾼 유개동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경기,서도소리의 명창입니다. 당대 최고의 소리꾼인 최경식으로부터 가사와 시조를 배웠고 박춘경에게는 잡가를 배웠습니다. 또한 장계춘에게 가사를 배우며 잡가와 가사, 시조를 잘 불렀던 소리꾼입니다. 유개동 하면 일화가 있습니다. 원래 한자와 한문에 능한 수재였는데 어느날 명창이 부르는 긴잡가를 듣고 글공부보다 노래에 취미를 붙이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소리판이나 공청에서 소리꾼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따라하며 소리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앞 서 이야기한 스승들을 만나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하며 실력이 만개합니다. 원래 한자에 능했던 사람이라 12잡가의 사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불렀으며 스스로 모든 글자를 기록할 만큼 학식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유개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은 경성권번의 활동입니다. 권번에서 민요선생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여럿 여류 명창을 배출하였습니다. 12잡가와 선소리 산타령을 잘 했던 사람입니다.

 

 

왕십리와 선소리산타령의 이명길

이명길은 어려서부터 소리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선소리산타령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활동했던 왕십리 선소리패의 우두머리(모갑이)가 되었습니다. 모든 소리꾼들이 그렇듯 좋은 스승아래에서 시작하는데 이명길 역시 당대에 손꼽히던 명창인 최경식에게서 긴잡가와 경기소리를 배웠습니다. 이명길은 주로 왕십리와 신당동 일대에서 활동을 많이 했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명길에 의해 선소리산타령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제자인 이창배에 의해 소리가 전승되었습니다.

 

평안도의 여류 소리꾼 박월정

기생 박금홍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실 본명이 금홍입니다. 당시 유성기 음반을 제작하는 회사였던 빅타레코드 문예부장 이기세의 부인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서도민요의 달인으로 김초향, 박록주와 함께 3대 황해도, 개성에서 공연을 하여 유명해졌습니다.

박월정의 단가, 판소리, 창작판소리 등은 유성기로도 녹음이 되어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1931년 서울에서 3대 여류명창공연을 하였고 1932년 개성공연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박월정은 원래 평안남도 출신이어서 해방 후에도 남편 이기세와 함께 북한에 터전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6.25 이후엔 그 소식을 알 수가 없어서 이후 활동에 대한 것은 알길이 없습니다. 박월정의 소리는 북한의 판소리와 서도소리를 연구하는 자료로도 가치가 상당히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