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 국가와 사회를 관장하는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그 시절은 성리학으로 세상의 이치와 만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음악도 성리학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음악은 완벽한 이상을 구현하는 것인데, 그중 악기를 만드는 재료인 흙, 돌, 나무는 온 천지를 담고 있는 재료이기도 했습니다. 성리학적 음악을 정비했던 조선초기의 천재 음악가들을 소개합니다.
스승과 제자
엣날에 대금을 잘 불던 선비가 있었습니다. 명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학문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당시 학문은 성리학이었으므로 누구보다도 성리학적인 시선에서 음악을 표현하는 것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렵다는 과거시험을 거쳐 (진사과) 궁에 들어간 그는 세자(왕의 아들)의 음악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좋은 스승 밑에 좋은 제자가 있다는 말이 있듯, 세자역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승은 대금을 잘했는데 세자는 현악기에 능통했습니다.
세자가 왕이 되자 본격적으로 음악정비에 나서게 됩니다. 앞장서서 맡긴 신하는 바로 어릴 적 자기를 가르쳤던 대금의 명수입니다. 왕은 세종대왕이고, 신하는 악학별좌를 맡았던 박연입니다.
이들이 벌였던 일들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반대를 일삼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음악정비를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이들은 가장먼저 음악의 근간이 되는 중심음 ‘황종’을 찾고자 하였는데 수많은 대신들은 황종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천자(중국황제)만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연은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세종은 뒤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마침내 황종을 찾게 됩니다.
우리의 재료로 악기를 만든 박연, 그리고 절대음감의 세종
16개의 돌이 주렁주렁 걸린 악기가 있습니다. ‘편경’이라는 악기는 본래 중국에서 들여오던 것이 었으나 세종은 박연에게 이 악기의 개발을 지시합니다. 박연은 황종을 기준으로 정확한 계량을 통해 16개의 음정을 갖춘 편경을 만들어 대신과 세종 앞에서 시연을 합니다. 이 때 세종대왕은 “한 음이 틀리게 들리는 것은 어찌됨인가?”라고 물었도 틀린 음을 조사해 보았더니 편경 돌이 덜 갈려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반인이 감지하지 못하는 영역의 음을 세종대왕이 정확히 간파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재료와 기술로 악기를 만든 것은 의의가 큽니다. 우리만의 자주성을 확보한 것과, 우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신호탄이 됩니다.
중국도 못한 일을 해낸 박연!
이 당시 궁궐의 음악은 그 명맥이 끊겨 있었습니다. 원 간섭기와 고려 말을 지내며 옛 궁궐에 내려온 의례와 음악들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탓에 어떤 음악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을만큼 의례는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세종은 박연에게 아악의 정비를 지시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악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중국황실에서 전해진 음악이지만 당, 송을 거치며 원래 형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박연은 명의 성리학 창시자인 주자의 문헌을 근거로 끊임없이 아악의 본래 형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박연은 중국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악을 복원해냈고 이로 인해 궁중 의례는 다시 정상적으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균형잡힌 음악 연주
박연은 아악에 애착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관심은 우리 백성이 즐기던 향악에 있었습니다. 궁중의례에서 박연은 아악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세종은 백성이 즐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향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이 때 이 둘 사이를 중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연보다 직위가 높았던 맹사성은 아악과 향악의 조화를 건의하여 궁중 의례에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종은 이 의견을 마음에 들어하여 향악을 추진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맹사성은 나이가 많아서 일찍 죽게 됩니다. 맹사성이 죽으니 향악을 사용하는 일은 힘이 빠지게 됩니다. 향악을 들여오기엔 너무 힘든 상황에서 세종은 향악을 기반으로 직접 노래들을 만들어 냅니다. 여민락, 정대업, 보태평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종의 의지는 그의 아들 수양대군이 이어서 세조 6년에 세종이 작곡한 음악으로 종묘제례악을 다시 정비합니다.
세종이 꿈꾸던 아악과 향악의 조화가 실현되고 이후 500년동안 조선 의례를 책임지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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