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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조선시대 만능엔터테이너 ‘세종’

중학생 때 무턱대고 외웠던 항목 중 기틀마련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엔 무슨 말인지 모르고 무턱대고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고대시대에도 기틀마련 중세에도 근세에도 계속 등장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어른이 되서야 깨달았습니다.

 

세계 어느나라 역사를 봐도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대체로 체제가 완성되는 시점인데 나라의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시기입니다.

 

법과 제도를 통해 중구난방이던 사회적 분위기가 하나로 통합되고 질서가 잡히면서 국력이 강력해집니다. 그래서 도량, 의복, 통치체계, 등 여러가지를 사항을 통합하는 일은 옛날부터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조선초기, 국악이 체계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합니다. 그 중심엔 바로.....

상대적으로 늦는 음악 정비과정

법률이나 관등제, 세금제, 지방행정은 비교적 오래전 시절에 정비됩니다. 그러나 음악은 대체로 늦게 정비가 되곤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했었던 고대-중세 시절엔 음악의 정비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정비한 사람은 세종대왕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세종대왕의 치세는 태평성대의 이미지가 있지만 나라가 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닙니다. 고려에서 새 나라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북방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 그리고 아직 정비하지 못한 체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세종대왕은 음악을 정비하는 일을 놔두지 않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왜 음악을 정비하려 했을까요?

 

유교의 통치이념과 음악

조선을 건국했던 주요 세력인 신진사대부는 고려말의 불교의 폐단을 보았습니다. 또한 성리학적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이 조선의 이념을 유교로 만든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리학의 뿌리는 공자입니다. 공자는 예로부터 음악을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보았고 백성의 통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세종이 이룩하려는 것은 나라가 바뀌고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는 일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음악이 함께 울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도량과 음악

세종이 음악정비를 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국가의 기반인 도량형을 수립하는 것과도 매우 큰 관련이 있습니다. 박연과 함께 음악의 중심음 황종을 찾으려 노력을 했는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대나무로 그 사이즈가 정확하게 계측되었습니다. 황종 음을 연주하는 대나무 통에 곡식을 넣은 것이 1홉의 기준이 되었고, 1홉의 10배가 1, 1되의 10배가 1말이 되었습니다. 음악을 구성하는 황종과 다른 음이 정확한 정수비례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12개의 음을 만들어냅니다. 음악을 단순한 철학적인 도구 외에도 수학적 계측과 이성적인 사고로 음악의 이치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에서 나오는 정교한 비례와 울림, 조화가 백성을 이롭게 만드는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음악을 만들다.

앞서 이야기 한 황종을 찾는 일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세종과 함께 했던 악학별좌 박연은 우리음악의 중심음인 황종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을 수십번의 상소로 건의했습니다. 세종은 박연의 상소를 받아들여 황종을 찾기 시작하였고 그 일을 박연에게 맡깁니다. 박연은 중국의 자료를 통해 황종을 구현하려 하지만 번번히 음높이가 맞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우리와 중국의 지역적 풍토가 다름을 지적하였고 마침내 박연은 우리만의 도량법으로 황종을 구현해 냅니다.

 

중국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어도 세종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독자적인 우리의 소리였습니다.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이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백성이 있었습니다. 예술적 경지보다 건국이념과 정책에 대한 고민을 했기 때문에 아악만 의례에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세종은 중국의 아악과 우리 백성의 음악인 향악을 조화롭게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 끝에 왕이 직접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만든 노래가 바로 여민락입니다.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을 지닌 이 곡은 왕의 행차에 사용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만큼 세종은 통치과정에서 백성과 함께 하고 싶었던 의지가 강했습니다.

조선의 건국정신과 백성에 대한 마음이 잘 드러나는 '용비어천가'

 

작곡가 세종

세종은 신하들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종은 다양한 향악을 기반으로 막대기로 땅을 치며 박자를 맞추어 작곡을 하였습니다. 실록에는 하루아침에 만들었다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자시절부터 세종은 악기에 능했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집니다. 박연과의 인연도 세자시절 음악선생님과 제자의 관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그의 음악적 재능은 직접 음악을 만드는 일까지 이어집니다.

 

국악에도 서양에 뒤지지 않는 '정간보'라는 기보법이 있습니다.

세종의 작곡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향악을 정확하게 기보하기 위해 새로운 기보법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정간보입니다. 세종의 정간보는 단순히 음악을 기보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존의 중국식 음악에서 벗어난 음악체계를 확립하였고 백성들이 자주 부르던 향악을 인정하며 백성 모두가 즐거워하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누군가에겐 단순히 음악정비로만 보일 수 있지만 세종의 음악정비작업은 모두가 꿈꾸는 태평성대, 그리고 그 중심에 백성이 행복한 나라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담긴 귀중한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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