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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판소리의 가왕 송흥록 - 2편

판소리의 가왕 송흥록 - 2

 

* 벼슬을 받고 가왕이 되기까지

 송흥록 명창이 가왕이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철종이 재위할 시절 (철종 10) 조선 중, 후반에 궁중에 들어가 소리를 선보이고 난 뒤 그의 총애를 받아 통정대부의 관직을 받게 됩니다. 그 당시 통정대부는 정삼품의 벼슬이었습니다. 궁중에 들어가기까지 그를 도왔던 조력자 바로 좌찬성 김병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송흥록은 김병기의 눈 밖에 나며 철종 13년 함경도로 귀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는 가왕이란 호칭을 얻게 되었을까요? 바로 헌종 때 궁중에서 벼슬을 제수받고 활동하던 소리꾼인 모흥갑 명창으로부터 얻은 호칭이었습니다. 모흥갑 명창은 그의 소리를 듣고 감탄하며 가왕이라 칭송하였고 훗날 주덕기라는 고수가 송흥록 명창은 공력이 모자란 소리라며 여러 사람들 앞에서 흉을 볼 때 직접 나서서 주덕기를 꾸짖으며 그는 공전절후의 국창임을 주장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계기로 송흥록은 궁중과 소리꾼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자타공인 가왕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원에 있는 송흥록의 생가 (자료출처: 전라북도 홈페이지)

 

* 변화무쌍한 동편제를 만들어내다.

 송흥록은 동편제의 대가이자 동편제 소리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확립한 인물입니다. 그는 기존에 밋밋했던 판소리의 선율에 가장 느린 장단인 진양조를 도입하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비장미를 더하는 구슬픈 느낌의 계면 선율을 다채롭게 구사하여 더욱더 정교한 계면조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를 반증하는 그의 장기는 춘향가의 귀곡성이었습니다. 계면조로 되어 있는 귀곡성은 매우 부르기가 까다로운 소리로 명창의 대열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면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힘든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귀곡성에 대한 일화는 여러 가지의 후담들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앞서 맹렬과의 이별하는 순간 불렀던 단장곡의 일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송흥록은 귀신의 울음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무덤가를 찾아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연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잠시 그 곳에서 잠이 들었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 귀곡성을 다시 불러보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송흥록의 귀곡성을 들은 노인은 귀신의 소리는 그렇게 내는 것이 아니라며 직접 시범을 보여줬고 그에게 따라 해 보라 합니다. 귀곡성을 부르고 나니 어느새 노인은 사라져있고 놀란 그는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 이후 귀곡성을 터득하였다는 설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계면조뿐만 아니라 우조의 선율 또한 획기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조는 평조와 별다를 것이 없거나, 정가에서 모티브 하여 만들어진 가곡성의 우조의 형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탈피하여 호령하는 듯한 호령조와 화평한 느낌의 화평조 등 다양한 우조들을 시도하고 개발하여 판소리에 도입하였습니다. 이로써 동편제의 우조적인 면모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그는 판소리의 장단 즉 길고 짧음을 소리의 이면에 맞게 적제 적소에 사용하였으며, 계면선율과 우조 선율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기존의 단순한 조성의 판소리를 다채롭고 표현의 폭을 넓혀주었습니다. 비장미와 장중미를 모두 구사하여 불렀던 다재다능한 그의 소리는 당시 좌상들의 호평을 받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동편제 기틀의 확립에 지대한 공을 남긴 소리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편제 소리를 전수받은 사람은 동생인 송광록과, 수제자 박만순이었습니다. 이들은 송흥록 명창의 동편제 소리의 명맥을 이어받아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판소리 업적은 오늘까지도 많은 소리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영원히 가왕으로 남의 송흥록 명창. 그의 소리에 대한 열정은 후학들에게도 많은 귀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