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가 강해지는 순간?
통솔이 강해야 한다!! - 왕권강화
왕의 말을 신하와 백성이 잘들으려면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권위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왕을 넘볼 수 없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병권을 장악하는 것과 나라의 돈을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왕위를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혈통까지 넘볼 수 없으면 왕권이 완성되고 강력한 권위가 생깁니다.즉 왕권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아무나 왕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되면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집니다. 전제왕권의 폐해가 많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왕권.. 즉 왕의 힘입니다. 왕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는 그 이후에 이야기입니다.
부족국가에서 빠르게 중앙집권국가로 빠르게 전환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점점 전제국가화 됩니다. 왕위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나라의 국력이 달라집니다.
왕위세습이 가장 빨랐던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은 5개의 부족을 5부로 행정지역으로 개편하며 지역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고 족장들을 귀족으로 편입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왕위를 자식에게 물려줌으로 중앙집권화의 틀을 만들어냅니다.
백제는 4세기 무렵 근초고왕 때 세습이 이루어지는데 이미 나라가 어느 정도 강력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 뒤에 설명합니다.) 근초고왕은 정복전쟁에 능해서 남으로 마한연맹체를 많이 점령하였고, 위로 평양성을 공격하여 성과를 냅니다.(고국원왕은 이 때 전사했고 고구려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이런 성과로 인해 자연스럽게 왕위 세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도 4세기에 내물마립간(내물왕)부터 왕위세습이 되었습니다. 내물마립간 역시 정복전쟁으로 진한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며 중앙집권체제의 틀을 마련하며 자연스레 왕위세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마립간’이라는 독특한 칭호를 사용했는데요, 왕을 칭하는 명칭을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왕의 힘이 강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화입니다.
국가의 질서가 확립되어야 한다. - 율령반포(관등제, 신분제 정비)
율령은 곧 국가의 관등을 정비한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형벌과 제도입니다만 그 안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것은 ‘신분’입니다. 관직과 신분의 차이를 두어 사람을 계급화 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족장들은 귀족으로 편입되어 왕 바로 밑에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됩니다. 귀족들과 왕실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왕권이 강화됩니다.
아울러 지방과 행정에 대한 법이 생기고 형벌을 두어 사회 질서를 확립하게 됩니다. 따라서 율령을 반포하는 시대는 국가가 강력해집니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율령을 반포한 왕들이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백제는 3세기에 율령을 반포함으로 다른 나라들 보다 앞서서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고이왕은 율령을 통해 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은 병권을 거머 쥐며 왕권을 한층 강화하였고 주변국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백제가 강성해 지는 토대를 바련했습니다. 왕위세습은 고구려보다 늦었지만 율령이 먼저 반포되었기 때문에 힘이 강했습니다.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왕이 전사하는 통에 국가적 위기 상황에 봉착한 고구려는 빨리 체제를 정비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막중한 사명을 맡은 왕은 ‘소수림왕’입니다.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뒤를 이은 그는 중국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들여오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수립하였으며 마침내 율령을 반포함으로 국가 체계를 빠르게 안정시켰습니다. 이 덕분일까요? 소수림왕 이후 광개토-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는 정말 강력해집니다.
신라는 지증왕-법흥왕 부자를 통해 체제를 정비합니다. 지증왕은 국력을 위해 ‘순장’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장려하여 농업생산량을 늘리게 하였습니다. 또한 국호를 ‘신라’로 통일하고 지방군주를 세우는 등 지방행정체계를 정비합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관등을 제정비 하였으며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제도를 개편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나라의 토대가 길러졌으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후대의 왕인 ‘진흥왕’시대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사상이 통합되어야 한다. - 불교공인
백성들이 한 마음 한뜻이 되려면 공통의 사상적인 관심사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르면 뜻도 달라지고 뜻이 다르면 국가가 한방향으로 가기가 어렵습니다. 서양사에선 그 역할을 '크리스트교'가 했다면 동북아시아 역사에선 '유교', '불교', '도교', 가 그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불교'의 영향력이 컸고 왕실과 대중 양쪽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율령이 반포되던 시기에 불교가 같이 공인됩니다. 우리는 흔히 전성기에 있었던 왕들을 기억하곤 합니다. 그러나 전성기가 되도록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일 것입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을 빨리 극복하고자 애를 썼는데 그 결실로 율령, 태학, 불교를 고구려에 안겨줍니다.
신라는 역시 지증왕-법흥왕 부자가 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증왕이 뿌린 씨앗을 아들인 법흥왕이 더욱 잘 가꾸어냈다고 할까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가 계기가 되어 불교가 공인됩니다.
이에 비해 백제의 불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습니다. 사실 늦었다기 보단 워낙 율령반포가 빨랐기 때문에 불교가 전파된 시기가 늦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백제는 침류왕 때 동진으로 부터 불교를 들여와 수용했습니다.
*이차돈의 순교(삼국사기)
이차돈은 왕앞에서 불교를 공인할 것을 주장하며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를 왕이 죽이자 그의 피는 흰색으로 솟구치고 이어서 꽃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본 왕과 신하들은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힘을 키우지 못한 가야
가야는 전제왕권을 갖추지 못하고 연맹왕국체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확실한 율령반포나 불교공인이 없었습니다. 결국 힘이 강성해진 신라에 복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야가 가지지 못한 것은 국력(군사력)일 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중계무역, 철기문화를 꽃피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