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가와 처용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처용무’는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처용가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처용설화의 내용은 통일신라 말 49대 왕인 헌강왕 때의 일이었습니다. 헌강왕이 행차하며 개운포(지금의 울산)라는 곳에 나가 잠시 머무는데 갑자기 하늘에 운무가 끼며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됩니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신하에게 물으니 동해의 용이 부리는 조화이니 좋은 일을 행하여 용의 노함을 풀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이 후 헌강왕은 개운포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였고 그러자 먹구름이 걷히며 다시 맑은 하늘을 비추었습니다. (때문에 이곳의 이름이 개운포라 지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늘 위로는 동해의 용이 일곱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춤을 추며 기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곱 명의 아들 중 하나였던 ‘처용’이라는 아들이 헌강왕을 따라 경주로 내려왔고 관직을 맡아 왕의 정사를 돕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용은 절세미녀의 아내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용의 아내를 흠모한 역신(역병, 돌림병)이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아내와 함께 그의 집에서 자게 됩니다. 처용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불속에 있는 네 개의 발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용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닌 오히려 반대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이에 역신은 처용의 관용에 놀라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사죄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처용의 그림이 붙어있는 문만 보아도 들어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게 됩니다. 이후부터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그림을 대문에 붙여 역신으로부터 집안을 지키고 좋은 기운을 맞아들인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설화적 바탕으로 처용가는 무속요의 일종으로 축사나 벽사진경(僻邪進慶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노래로 쓰였습니다. 처용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처용가는 8구체로 되어있는 향가로 이것이 고려시대로 넘어가면서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기록되었고, 이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민속 신앙으로부터 시작된 처용무는 궁중의 무용으로 들어와 연례행사나 나례 의식에서 추는 의식무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918~1392년)까지는 한 명의 무용수가 추는 춤이었으나 조선 세종 (1418년~1450년) 때 다섯 명의 무용수가 추는 형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다섯 명의 무용수는 오방 신을 나타내는 동, 서, 남, 북, 중앙을 의미하고, 각각의 방위를 상징하는 색인 동-파란색, 서-노란색, 남-빨간색, 북-검정색, 중앙-흰색의 의상을 입고 춤을 추었습니다. 음양오행설을 담고 있는 유교 철학이 엿보이는 춤입니다.
궁중 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형상으로 된 탈을 쓰고 추는 춤인 처용무는 팥죽색의 얼굴과 하얀 치아를 드러낸 모습의 처용탈을 쓰고 검은색 사모를 머리에 얹고 춥니다. 그리고 납으로 된 구슬 목걸이와 주석으로 만든 귀걸이를 몸에 장식합니다. 사모의 위에는 모란꽃 두 송이와 복숭아 열매 일곱 개를 꽂습니다. 이는 귀신을 쫓고 경사를 맞이한다는 벽사진경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악귀를 쫓는 춤이기 때문에 매우 장엄하고 호방한 기운의 춤사위를 펼칩니다. 씩씩하고 활기찬 동작이 많은 처용무는 주로 남자들이 추었던 춤이었으나 처용무를 즐겨했던 연산군 (조선 1494∼1506) 때에 이르러 궁중의 기녀들에게도 추게 하여 의식무로서의 측면이 줄어들고 연 악무의 성격으로 점차 변모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현재까지 오랜 세월을 거쳐 전승 보존되고 있는 처용무는 1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춤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여유와 풍습을 담고 있는 처용무가는 아무리 ‘악귀일지라도 관용과 웃음으로 즐겁게 하여 보낸다.’ 라는 선조들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